생물교육과 역사
학과 창설 및 그 의의
생물교육과는 1946년 8월 22일자로 미군정령 미군정령 제 102호 “국립서울대학교 설치령”에 의하여 서울대학교가 창설되면서 사범대학내에 설치되었다. 우리 나라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제2급 중등과학교사 (생물전공)의 양성을 주목적으로 하였다.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생물교육과는 우리 나라 전역에서 생물학을 전공하여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생물교사가 되기를 희망하는 수재(秀才)와 재원(才媛)들이 모두 모여 들어 민주교육의 중견인물로서 선봉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생물학과 스승의 도를 배우는 곳이다. 이렇게 지켜온 연륜은 어언 50년, 그 역사는 생물교육과의 존재 의의를 더욱 뚜렷이 빛내 주고 있다.
생물교육과를 졸업하면 생물학을 전공한 이학사로써 대부분 생물을 가르치는 중·고등학교의 생물교사가 된다. 그러므로 졸업생들은 자기전공을 살려 우리나라 교육계의 중진으로 눈부신 공헌을 하고 있다. 졸업생 중에는 중·고등학교 생물 교육에만 만족하지 않고 생물학의 발달에도 나래를 활짝 펴고 생물학의 연구와 생물학자의 양성에 헌신하는 대학교수와 연구원의 수만도 백명을 휠씬 넘게 헤아린다. 우리나라 생물교육의 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생물학에 관한 기초교육과 생물학의 전문교육기관인 대학 등의 전 생물교육기관에서 명실공이 가장 크게 활약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의 생물학이나 생물교육계의 단일 학과로 평가한다면 당연히 엄지임에 틀림없다.
학과 변천 상황과 약사
1) 태동-창설기
1945년 8월 15일에 우리나라가 일제치하에서 해방이 되자 경성사범학교를 운영하던 일본인 선생들은 모두 물러가고 9월에 장이옥 박사가 경성사범학교 교장선생님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 때 생물학 교수로 김준민 선생님을 모시게 되었다. 1946년 8월에 국립서울대학교가 창설되면서 경성사범학교와 경성여자사범대학교를 통합하여 사범대학은 9개의 단과대학 중 하나의 단과대학으로 설치되었다. 사범대학에는 교육과, 국문과, 영문과, 사회교육과, 수학과, 물리화학과, 생물과, 가정과, 체육과 등 9개 학과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의 학과로 창설되었다. 식물생태학을 전공하신 김준민교수는 생물과의 창시자로 학과에 일을 맡아 교육과정을 짜고 1946년 제 1학기 생물학(4학점)을 강의하셨으며 동물학(4학점) 강사로는 조복성 선생님을 모시어 첫 학사 운영을 개시하였다. 김준민 교수는 1946년 10월 22일자로 발령을 받아 생물과는 단 11명의 전임교수진으로 출발하였다. 이것이 생물교육과의 역사적 태동인 것이다. 학생은 당시의 경성사범학교의 본과 2학년생들 중에서 예과 5년을 수료한 반학생은 사범대학 각 학과의 1학년에 진입시키었고 본과 3학년 졸업생은 원에따라 2학년에 편입시키었다. 그러므로 사범대학은 1, 2학년의 학생으로 개교를 보게 된 것이다. 생물과 학생은 1학년 진입생만을 받을 수 있어 총 4명의 학생으로 문을 열게 된 것이다. 당시 네명의 학생은 오계칠 (서강대 교수, 정년퇴임), 이웅직 (정년퇴임, 명예 교수), 주일영 (중대 교수, 정년퇴임)외에 여학생 한명이 끼어 있었다. 1949년 9월 오계칠, 이웅직, 주일영 등 3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사범대학의 소재는 당시 경성사범대학교가 을지로 6가에 있었고 경성여자사범학교는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었는데 사범대학으로 통합되면서 남·여사범학교가 을지로 교사로 합쳐져 처음으로 남여공학을 하게 되었다. 1954년 12월 23일 동대문구 용두동 교사로 옮기기까지 이곳에 자리잡고 있었다.생물과는 1947년 유전학을 전공한 이기인 교수 (1947. 1. 1 ~ 1950. 2. 28)를 모셨고 1948년에는 미생물학을 전공한 김삼순 교수 (1948. 3. 1 ~ 1948. 8. 31), 동물생태학을 전공한 최기철 교수(1948. 4. 1~1976. 2. 28. 본대학 정년퇴임), 식물분류학을 전공한 장형두 교수 (1948. 9. 1 ~ 1949. 10. 23)가 부임하셔서 전임교수진을 보완하게 되었고 학생도 4학년 4명, 3학년 3명, 2학년 10명, 1학년 9명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학과 규모를 내 ·외면적으로 갖추게 되었다. 이 때가 바로 1948년의 일이다.
2) 부산-피난기
1950년 6. 25동란의 발발로 전쟁의 와중에서 사범대학은 9. 28(1950)과 1.4후퇴(1951)로 공백기가 도래하였고 서울대학교는 부산영도로 전쟁을 피해 전시연합대학의 천막 교실에서 피난길로 흐터진 학생을 모아 수업을 실시하다가 1951년 10월 20일 부산 대신동 가교사로 옮겨 사범대학이 단독으로 수업을 개시하게 되었다. 생물과는 동란 중의 전시하에서도 최기철교수가 헌신적으로 노력하여 어려운 고비를 넘기었으며 한분만이 남은 생물과 전임교수 진용을 1951년 미생물학을 전공한 이주식 교수와 식물분류학을 전공한 이덕봉 교수를 보강하였다. 가교사는 부산시 서대신동 3가 130번지에 신축된 판자 교사였다. 이 어려운 속에서도 생물 실험실 하나를 최기철 교수와 이주식 교수가 당시 2학년에 재학중이였던 박한진 선생과 함께 공동작업으로 건축하였다고 한다. 1951년 – 1953년도의 전란 중에서도 학생정원은 생물과가 120명이였다. 입학경쟁율도 완전히 회복되어 3대 1이 넘었다. 1950년도의 졸업식은 전시로 인하여 거행하지 못하고 1951년 9월 29일부로 졸업장만을 수여하였다. 이 때의 생물과 졸업생은 3명에 불과하였다. 1951년도 졸업식은 1952년 4월 26일에 부산대학 강당에서 거행되었으며 졸업장은 1952년 3월 31일부로 수여되었는데 생물과 졸업생은 10명에 이르렀다. 1952년도 졸업식은 1953년 3월 28일 부산시내 영선국민학교에서 거행되었으며 9명이 생물과를 졸업하였다. 이상의 사실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피난속에서도 외관상으로는 생물과가 위축된 것 같으나 내실은 초창기에 비하면 대단히 발전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 수복-정착기
1953년 8월 정부의 서울 환도와 함께 서울대학교의 이전계획에 따라 부산의 가교사에서 을지로 교사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1954년 12월 23일 동대문구 용두동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김준민 교수가 일본에서 귀국하시고 1957년 7월 유전학을 전공한 이웅직 교수가 생물과의 전임 교수 진용에 영입됨으로써 식물생태학, 동물생태학, 미생물학, 유전학 등의 분야에서 연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하였고 신입생의 모집 정원도 35명으로 증원되었으며 여러가지 직업중에서 교직이 가장 사회에서 우대를 받게되어 본 학과의 입학 경쟁율은 10대 1을 상회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국립대학의 경우 4년제 사범대학을 폐지하고 교육대학원을 설치한다는 교육 개혁의 조치에 따라 1962년 9월 29일 문교부는 사범대학에 가정, 체육, 생물, 사회생활과만을 존속시키고 420명의 학생을 배정하였다. 그러나 이 대학 정비안은 거센 반대에 부딪혀 폐지되고 다시 각 학과가 부활되어 생물과는 과학교육과 내의 생물 전공으로 축소되고 입학 정원도 10명으로 대폭 축소되게 되었다. 1963년 4월 12일자로 서울대학교 교육대학원이 설치되어 1부(주간)와 2부(야간)로 나누어 생물교육 전공도 신입생을 선발하게 되었다. 교육 대학원의 생물 교육 전공으로 1974년까지 입학한 학생의 수는 38명이었으나 졸업한 학생은 총 28명이 었다. 한편 1968년도 신입생의 과학교육과 생물 전공의 입학 정원도 20명으로 증원되었다. 1969년 1월에는 식물생리 생태학을 전공하는 장남기 교수가 취임함으로써 5명의 전임 교수 진용을 확보하게 되었다. 생물교육과의 입장에서 보면 교육대학원 생물교육전공 과정의 탄생과 교수와 학생들의 양적 보완은 사범대학 수난 중의 발전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4) 정착-발전기
1975년 서울대학교 종합화 계획에 따라 관악 캠퍼스로 역사적인 이전을 하게 되었다. 이 때 이주식 교수는 자연과학대학 미생물학과로 귀속하게 되어 과학교육과 생물전공의 전임 교수의 수는 4명으로 감소하게 되었다. 1976년 최기철 교수가 정년 퇴임하게 되어 3명의 전임교수진용으로 되었다.
1977년 10월 발생학을 전공한 정해문 교수를 전임 교수진으로 보강하였다. 그러나 1980년 김준민 교수가 정년 퇴임을 하게 되고 1981년 9월 세포학을 전공한 안태인 교수를 모시어 식물유전학, 식물생리생태학, 동물발생학, 세포생물학의 연구와 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전임 교수진을 확보하게 되었다.
1981년에는 서울대학교 대학원 과학교육과 생물교육 전공의 주간의 석사 과정이 개설되었고 1982년에는 과학교육과 생물전공이 생물교육과로 독립하게 되었으며 1983년에는 박사과정이 설치되었다. 그 결과 보다 수준 높은 생물교육에 관한 연구와 교육을 하게 되었으며 1988년에는 본과의 제1호 박사가 배출되어 더욱 더 연구의욕을 고취시킬 수 있게 되었다. 1988년 1월에는 생물교육을 전공한 김영수 교수가 부임하게 되어 과학교육과 생물교육의 연구에 박차를 가하게 되어 생물교육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1989년 8월 이웅직 교수가 정년 퇴임을 하시게 되고 1989년 8월에는 유전공학을 전공한 정구흥 교수를 전임 교수 진용으로 받아 들이게 되어 가일층 현대 생물학의 연구로 과의 분위기를 일신하게 되었다.
2000년 정해문, 안태인, 정구흥 교수가 자연과학대학으로 이적하여 전임교원의 수가 2명으로 감소하였으나 2001년 2학기에 생물교육학을 전공한 김희백 교수가 임용되어 전임교원의 수가 3명이 되었다.
2002년 3월 장남기 교수가 정년퇴임을 하셔 전임교원이 다시 2명으로 감소하였으나 2002년 2학기에 유전발생학을 전공한 전상학 교수가 임용되고, 2003년 1학기에 분자세포생물학을 전공한 이준규 교수가 임용되고 2003년 2학기에는 습지생태학을 전공한 김재근 교수가 임용되어 5명의 전임 교수진을 확보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생물교육과는 석, 박사 과정을 갖춘 학과로서 유전발생학, 분자세포생물학, 생태학 등을 포함하는 생물학의 전반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생물교육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굴지의 학과로 발전하게 되었다.